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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패션 유행

우리가 모르는 ‘된장녀’의 진실

여기, 패션지에 갓 실린 따끈따끈한 기사가 있다. “밤 11시30분. 보고 또 봐도 근사한 <섹스 앤 더 시티>를 시청하는 시간. 그래, 우리가 이렇게 열광하는 건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뉴욕, 뉴요커. …중요한 시험날 늦잠을 자고, 근사한 남자 앞에서 만취한 채 실수투성이… 그렇지만 어깨를 움츠릴 필요는 없다.자신감을 불어넣어 줄 뉴욕의 빈티지 에센스를 섭취한다면.”

또 여기, 인터넷을 이즈음 뜨겁게 달군 글 한 편이 있다.“아침 7시30분, 휴대전화 알람 소리에 기상한다.…졸린 눈으로 머리 감으러 욕실로 향한다.전지현 같은 멋진 머릿결을 위해 싸구려 샴푸나 린스는 안 쓴다.왜? 난 소중하니까. …학교에 도착해 학교 앞 던킨도너츠로 향한다.모닝 커피와 도너츠를 먹으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창밖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뉴요커인 것만 같다.…학교 수업을 마치니 오후 4시다.롯데백화점 명품관을 배회하면서 훗날 만날 결혼 상대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3천cc 이상의 그랜저를 몰고 다니는 키 크고 옷 잘 입고 유머 있는 의사’ 정도면 나한테 충분하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녀들의 대화는 계속된다.”(<된장녀의 하루>)


두 편의 글에 등장하는 ‘우리’와 ‘그녀들’은 동일 인물군이다.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명칭이며 태도가 천양지차이다.패션지는 이들을 ‘뉴요커를 꿈꾸는 여성들’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여성들’이라 부르며, 유행이나 트렌드를 선도하는 집단으로 우대한다.그런데 후자의 글을 유포하는 네티즌은 이들을 ‘된장녀’라는 해괴한 조어로 부르며, 비하 및 조롱의 대상으로 깎아내린다.

된장녀의 어원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여자들’이라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욕설 ‘젠장’이 인터넷상에서 ‘된장’으로 변용되면서 ‘젠장녀→된장녀’로 바뀌었다는 설, 서양 문화·서양 남자에 무분별하게 열광하지만 근본은 결국 토종을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들을 비하해 일컫는 말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분명한 것은, 코스모폴리탄이든 된장녀이든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지닌 젊은 여성들이 우리 주변에 출현했으며 이미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스타벅스 커피를 즐겨 마신다고 해서 ‘스타벅스 세대’라는 별칭이 붙어 있기도 한 이 여성층은 소비 트렌드를 주도한다는 특성 때문에 마케팅 측면에서도 중요하게 주목된다(50~51쪽 딸린 기사 참조).

패션지 <앙앙> 편집장 한성미씨는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가 급속히 개방되고 어학 연수 등으로 외국 문화를 접한 여성들이 늘면서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로 상징되는 이른바 뉴요커식 라이프스타일이 젊은 여성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됐다”라고 말했다.한씨의 말마따나, 이런 라이프스타일을 이미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여성들은 ‘뜬금없이’ 인터넷에서 촉발된 이른바 된장녀 소동을 이해할 수 없어한다.개인의 ‘취향’ 문제를 왜 ‘허영’으로 치환해 매도하느냐는 것이다.먼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스타벅스 마니아 신수경씨

대학생 신수경씨(23)는 거의 매일 스타벅스에 간다.학교 다닐 때는 공강 시간을 주로 이용한다.이유는? 혼자 책을 보고 공부할 공간이 필요해서이다.커피를 마시는 것은 부차적 이유이다.“하루 종일 답답한 학교 도서관에 있는 것은 내 체질이 아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스타벅스 커피값으로 한 달에 7만~10만원 정도를 쓰는 만큼 부담이 상당하지만 그녀는 스타벅스 다니기를 중단할 생각이 없다.

ⓒ최서영
신수경씨는 거의 매일 스타벅스를 찾는다.스타벅스는 번잡한 대도시에서 남들 눈치 보지 않고도 여자 혼자 책 보고 차를 마실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고 신씨는 말한다.
지난해 미국 보스턴에서 10개월간 어학 연수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스타벅스 단골이었다.나중에는 종업원들과 친해져 스키 여행까지 함께 다녀올 정도였다.그녀는 당시 경험 덕분에 스타벅스로 상징되는 도시형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이를테면 미국 대학생들은 거의 기숙사 생활을 한다.그런데 기숙사는 룸메이트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갑갑하고 활동의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그래서 찾게 되는 장소가 학교 잔디밭이나 스타벅스였다”라고 신씨는 말했다.

거대 도시 서울에서도 그는 ‘나만의 공간’을 찾아 스타벅스를 드나들게 된다고 말했다.여자 혼자 책을 읽거나 밥(주로 샌드위치)을 먹고 있어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 흔치 않은 공간, 그런 곳이 그녀에게는 스타벅스이다.

이 글로벌 커피 체인점이 한국에 등장하기 전에는 신씨도 커피숍을 주로 찾았다.신씨에 따르면, 커피숍은 상대가 있어야 자연스러운 공간이다.그런데 갈수록 친구들과 약속을 정하고 시간을 조율하기가 어려워진다고 그녀는 말했다.“우리는 지금 개인적으로 점점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뉴요커건 서울리언이건 마찬가지이다.다들 바쁘게 도심을 오가는데 그 속에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자리’를 오롯이 제공한다는 스타벅스의 마케팅이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구두 및 속옷 마니아 권은주씨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는 구두 사 모으기가 취미이다.월세가 부족해 세든 집에서 쫓겨날 상황에서도 그녀는 ‘마놀로 블라닉’ 수집을 멈추지 못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권은주씨(25·취업 준비생)는 구두 사 모으는 것이 삶의 기쁨이다.속옷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하는 그녀는 속옷도 열심히 수집한다.특히 에메필(Aimerfeel) 브랜드를 좋아해 이 일본제 속옷만 20벌 가량을 모았다.지난해 미국 뉴욕에서 6개월간 어학 연수를 받는 동안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벼룩시장과 중고 가게를 뒤지고 다녔다.

ⓒ시사저널 한향란
좋아하는 구두와 속옷을 사 모으기 위해 권은주씨는 식비를 아낀다.자취방의 구두 컬렉션을 선보이던 권씨는 이 중 진짜 명품은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다.그녀는 손톱·발톱 가꾸기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이것도 하나의 의상이고 액세서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란다.돈 주고 네일 아트를 하는 것도 아니다.독학한 대로 직접 손톱·발톱을 손질하고 색칠한다.혹시 남자 친구나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냐고? 절대 아니라고 권씨는 주장한다.“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느낌이 통하는 것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이것이 통한다고 느낄 때 만족스럽다.여자로 태어난 것이 너무 행복하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한때 영어학원을 다녔던 그녀는 매일 무늬가 바뀌는 자신의 손톱을 보고 동료 수강생이 “시간이 남아도나 봐요”라고 했을 때 정말로 기분이 상했다고 회고했다.권씨에 따르면, 그녀는 결코 시간이 남아 자신을 가꾸는 것이 아니다.일을 최우선으로 하되, 화장하고 옷 차려입고 손톱·발톱 가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녀는 잠을 한두 시간 덜 자는 쪽을 택한다고 했다.

잠을 선택할 것이냐, 몸 가꾸기를 선택할 것이냐는 권씨가 생각하기에 전적으로 가치관의 문제이다.삶을 놓고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다를 뿐인데도, 자신과 가치가 다른 이를 가차없이 매도하는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상처도 받게 되지만 그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자신을 사치스럽게 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그녀는 “내가 가진 것 중 솔직히 명품은 거의 없다.나는 부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러나 좋아하는 것을 사기 위해 그녀는 한 달 생활비인 30만원의 3분의2 가까이를 매달 기꺼이 투자한다고 했다.자신을 꾸미는 데 돈을 쓰는 대신 그녀는 먹는 사치를 포기했다.외식은 사절. 자취집에서 현미·잡곡밥에 김치·야채 반찬을 주로 해 먹으며 식비를 절약한다고 권씨는 말했다.

브런치 마니아 박주연

박주연씨(29·회사원)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서울 삼성동 파크하얏트 호텔 2층에 있는 한 레스토랑이었다.별 여섯 개짜리 호텔 식당답게 현대적이고 단순한 실내 장식이 돋보였다.잠시 후 박씨가 식당에 도착했다.루이비통 핸드백이 눈에 띄었다.약속 장소를 먼저 제안한 박씨는 “주말에 마음 내킬 때면 이곳에서 가끔씩 브런치를 먹는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 한향란
‘아침 겸 점시 식사’를 뜻하는 브런치는 젊은 전문직 독신 여성들의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왼쪽은 카페 <올리바>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여성들.
브런치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일컫는다.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캐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뉴욕 도심 카페에 모여 앉아 브런치를 즐기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자주 방영되면서 한국에서도 ‘20~30대 전문직 독신 여성들의 문화 코드’로 급부상했다.그런데 메뉴를 살펴보니 이 식당 브런치 값이 장난이 아니다.샐러드·수프·파스타 및 간단한 요리와 커피 정도가 제공될 뿐인데 1인당 가격이 6만원이다.물론 부가·소비세는 별도이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박씨가 말했다.“나도 이런 곳에 자주 오지는 못한다.평소에는 이태원에 있는 브런치 식당을 즐겨 찾는다.” 그녀에 따르면, 이태원 식당가의 브런치 가격은 보통 1인당 1만~2만원 선이라고 한다.주말이면 친구나 동생과 함께 이런 브런치 식당을 찾는다는 박씨는, 그 중에서도 ‘수지스’라는 가게를 애용한다고 했다.“그 식당은 고급스럽다기보다 소박하고 시골스럽다.마치 유럽 여행을 갔다가 외국인 아줌마가 차려준 밥상을 받았을 때 같은 느낌이 난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영국 유학을 다녀온 그녀는 브런치가 특정 계층의 독특한 문화인 양 한국에서 변형되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런치와 브런치 메뉴에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그런데도 여성들은 굳이 브런치 메뉴를 고른다.왜? 한국에서는 아직 브런치가 일반화해 있지 않으니까. 그런 데서 자기 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라고 박씨는 분석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전문직 독신 여성으로서 고소득층에 속하는 그녀는 “나는 가방을 사거나 맛있는 것을 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스스로를 진단했다.이런 데만 매달 50만원 이상씩 쓴다고도 했다.이를 두고 미쳤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있겠지만 박씨는신경 쓰지 않는다.

“얼마 전 아는 분과 대화를 나누었다.그분은 명품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그래서 당신은 월급 타면 저축할 몫을 빼고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지출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더라. 그냥 지지부진하게 돈을 쓴 것이다”라고 말하는 박씨는, 변변한 취미조차 없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불행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만큼 쓸 수 있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라는 그녀는 자신과 이같은 생각을 공유하던 친구들이 결혼 이후 너무 쉽게 자신을 위한 투자를 포기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성별 대결로 변한 된장녀 논쟁

이른바 된장녀 논쟁을 주도하는 것은 흥미롭게도 대부분 남성이다.일부는 이렇게 논쟁이 성별 대결로 번진 배경에 성별간 문화 지체 현상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성별 특성상 여성은 남성에 비해 변화에 대한 적응이 빠르다.이태원 문화에 밝은 프리랜서 송현정씨는 “특히 한국 여성들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남다르다”라고 주장했다.외국에 나가도 여성들은 현지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지만 남성 중에는 귀국 날만 꼽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앙앙> 편집장 한성미씨는 “내 힘으로 따라잡기 힘들겠다 싶으면 한국 남자들이 (변화하기를) 지레 포기하는 데 반해 한국 여자들에게는 도무지 그런 심리적 저지선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따라서 외환위기를 전후해 급속히 이식된 이른바 글로벌 문화에 여성들이 빠르게 적응한 데 반해 남성들은 처지면서 남녀 간에 일종의 문화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렇게 보자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이슈 등으로 인해 한국 사회 개방을 둘러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된장녀 논쟁이 등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런가 하면 <패션의 제국>을 쓴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덧없이 경박한 것에 많은 사람들이 이끌릴수록 민주주의는 진전된다”라고 선언했다.소비를 죄악시하고, 패션으로 사회적 위신을 과시하려는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자들에게 맞서 패션 옹호론을 편 것이다.그는 패션의 지배가 대중을 소외시킨다는 가설에 동의하지 않으며, 오히려 대중이 더 빨리 변하고 다양한 스타일에 매혹될수록 자율성이 확대된다고 주장했다.한국 사회에 등장한 코스모폴리탄형 여성들에게서 새로운 사회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단 특정한 스타일·유행을 좇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사람들은 리포베츠키에 따르자면, 진정한 패션을 추구하는 ‘개인’이 아니다.조만간 <2000년대 초반 한국 사회 속의 소비 행동을 나타내는 6가지 집단에 대한 분석>을 발표할 계획인 황상민 교수(연세대·심리학)는, 이른바 된장녀에서 ‘간지쟁이’ 곧 철부지 소비자의 혐의를 읽어냈다(일본어에서 유래한 ‘간지’는 멋과 폼을 일컫는 인터넷 은어이다).

실제로 허영기 때문에, 또는 남들 따라 하느라 이들 문화의 ‘거죽’만 흉내 내는 여성도 적지 않다.권은주씨는 “별 생각 없이 패션 잡지를 따라 하는 친구들도 있다.남자 친구에게 얻어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자들도 많다.이런 여자들은 마음이 공허하다 보니까 더 허상을 좇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확고한 자기 스타일을 갖고 있는 ‘노블리제’ 집단과 달리 ‘간지쟁이’ 집단은 다른 사람이 주도하는 유행이나 트렌드를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황상민 교수의 지적이다.스스로는 이를 ‘취향’이라 주장하지만, 흉내를 취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허다하다는 것이다.코스모폴리탄이냐, 된장녀냐. 그 경계는 가깝고도 아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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